죽음이라는 악취- 『슬픈 불멸주의자』
슬픈 불멸주의자
셸던 솔로몬
제프 그린버그
톰 피진스키
지음
이은경 옮김
흐름출판
2016. 11. 1
출근길 차도에서 직접 생명의 위협을 느끼거나 인터넷 기사를 통해 유명인의 부고를 접하지 않더라도, 죽음을 암시하는 무언가로 우리의 하루는 가득 차 있다. 아침에 일어나 세면대 앞 거울에 비친 얼굴을 마주할 때. 쓸어 올린 머리 사이로 드문드문 흰머리가 보이고 눈 밑 지방은 점점 두툼해지고 있으며 뺨에 새로 생긴 이상한 반점을 발견한다. 면도를 하다가 벤 상처에서 붉은 피가 흐른다. 아파트를 오르내리는 두 대의 엘리베이터 중 평소 소음이 적고 더 튼튼하다고 생각한 것을 타고 내려간다. 회사에 도착하면 탕비실에서 시리얼을 먹으며 잠시 대장암으로 죽은 삼촌을 생각한다.
《슬픈 불멸주의자》는 불안과 공포를 바탕으로 한 행동학 연구 보고서지만, 구체적으로 임박한 확실한 위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위험이 닥칠 기미가 전혀 없음에도 마음 속 그늘에서 언제나 기다리는 죽음의 공포, 끊임없는 실존적 공포가 인간 행동의 기저를 이룬다는 가정을 바탕으로 실험 사례를 엮은 책이다. 1970년대 말 캔자스대학 실험사회심리학 박사 과정에서 만나게 된 세 명의 저자들은 죽음의 공포에 대처하기 위해 사람은 가치 있는 삶을 얻고자 노력한다는 <어니스트 베커>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공포 관리 이론>이라 명명한 학설을 소개하고, 25년간 죽음의 공포가 인간사에 미친 영향을 조사했다.
영특한 생물인 인간은 시간과 공간 위에서 만물이 유전한다는 것을 인식하기에, 모든 생물이 죽으며 자신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걸 안다. 인간은 여느 생물과 마찬가지로 영속하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을 품은 한편, 그것이 부질없다는 사실 또한 인지할 수 있다는 불행한 상황에 처해 있다. 인간은 대략 세 살 무렵부터는 오솔길의 다람쥐 사체를 보거나 기르던 금붕어가 죽어 장례를 치르거나 하며 죽음이라는 개념을 인식하게 된다. 아이들은 철이 들면서 결국 죽음이란 피할 수 없고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부모 역시 약하고 유한한 존재라는 걸 알고 나서는 심리적 평정을 얻는 기본 원천을 부모에게서 자기가 속한 문화로 전환한다. 이 책에서는 인간이 죽음이라는 실존적 공포에 대응하는 전략을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한다. 하나는 문화적 사물 체계를 통해 사회를 구성하는 일부로 자신을 인식하여 영속하는 광대한 체계의 일원이 되었다는 상징적 불멸성을 획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이러한 세계에 가치 있는 공헌을 하고 있다는 생각인 자존감을 얻는 것이다. 책의 실험 사례에서 사람들은 죽음과 관련된 사고를 강화한 조건에서 자신이 포함된 문화에 대한 신념을 강화함으로써 평소보다 편향된 선택을 하거나,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부나 명성에 더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죽음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은 개인의 행동뿐만이 아니다. 책은 인류사 전체에서, 즉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죽음의 공포에 맞서 온 인간의 광범위한 자취를 살핀다. 생물학자 <아지트 바르키>는 상징, 자의식, 미래를 고려하는 능력을 지닌 새로운 종족(인간)에게, 저항할 수 없는 죽음의 공포는 <생존과 번식 적합성에 필요한 활동 및 인지 기능을 방해하는 막다른 진화 장벽>이었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조상들은 죽음을 피할 수 있고 번복할 수 있는 초자연적 세계를 만드는 것으로 대처했다. 가장 흥미진진한 초자연적 이야기를 만들어낸 집단이 죽음의 공포에 가장 잘 대처해 나갔다. 죽음이나 재난을 맞이했을 때는 <의례>를 통해 죽음의 공포를 일상생활이 가능한 수준까지 억눌러 자연을 통제한다는 환상을 만들어 냈고, <예술>은 <현실의 상스러움>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초자연적 세계를 구성하고 유지하게 해주었다. 저자는 좀 더 나아가 농경 경제에서 초기의 도시가 탄생했다는 기존의 주류 인류학과 의견을 달리하고, 죽음을 둘러싼 의례가 대규모 군집과 기술을 필요로 했고 필연적으로 농경 및 도시문화의 발달을 이끌었다는 견해를 밝힌다.
오늘날에는 실제적 불멸을 꿈꾸는 사람도 있다. <데카르트>는 인체를 <흙으로 빚은 기계>로 보았고 <기계>가 망가지면 문제가 생긴 부품을 찾아내서 수리하는 일이 언젠가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다는 점에서 이런 부류의 선두였다고 할 수 있다. <레이먼드 커즈와일>은 저서 《영원히 사는 법》에서 생명 연장술이 개발될 특이점까지 최대한 건강하게 살아남는 법에 대해 소개한다. <알코어 생명연장 재단>은 20만 달러에 시체의 냉동과 해동을 제공한다. 머리와 뇌만 보존하면 8만 달러로 비용이 굳는다. 시체 소생이 가능해지는 시대까지 액체질소 용기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도로 발달한 현대의 인간은 죽음의 공포를 실제적으로, 상징적으로 적절하게 처리하고 있을까? 이 책의 저자들은 실존적 공포에 대처하기 위해 고안한 문화적 사물 체계는 결국 죽음의 불가피성을 숨기기 위해 현실을 방어적으로 왜곡하고 애매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이런 <필연적 거짓말>은 대인간계에서 갈등을 일으키고 우리의 육체적, 심리적 행복을 저해한다.
인간이 죽음을 생각할 때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심리적 방어 기제를 사용한다. 죽음을 의식하는 경우 <중심 방어>가 활성화 된다. 이에 따라 죽음에 대한 불편한 생각을 억누르거나 주의를 딴 데로 돌리려는 합리적인 노력을 하게 된다. 죽음을 무의식적으로 떠올리는 경우에는 <말단 방어>를 활성화 한다. 이 기제는 겉보기에 죽음이라는 문제와 아무런 논리적 관련이 없어 보일 수 있다. 자신의 문화적 가치를 거부하는 타인을 폄하하거나 자존감을 북돋우려는 시도는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다는 적나라한 사실과 직접적 관련이 없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무의식적 암시를 받은 판사는 범죄자에게 더 가혹한 형벌을 내릴 위험이 있다. 혹은 비슷한 자극 하에서 정치 결정권자들은 타 문화권에 속한 사람에게 더 잔인하고 가혹한 판단과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중심 방어와 말단 방어는 동시에 작용한다. 중심 방어는 죽음에 관한 생각을 정신의 최전선에서 몰아내고, 말단 방어는 무의식적인 죽음에 관한 생각이 의식으로 떠오르지 않도록 기능한다. 따라서 우리는 죽음을 암시하는 자극의 공격을 매일 받으면서도 그런 생각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믿는다. 저자는 무의식적으로 떠올리는 죽음에 대한 생각이 우리의 의식적 판단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구체적이고도 흥미로운 실험 사례를 다채롭게 소개한다. 이 책은 이러한 작용을 통해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대한 인간의 의식적, 무의식적 고민이 점심 식사 메뉴, 해변에서 바를 자외선 차단제의 양, 지난 선거에서 투표한 후보, 쇼핑에 대한 태도, 정신 및 신체 건강, 사람을 사랑하고 미워하는 일 등 일상사부터 중대사에 이르는 거의 모든 일에 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한다.
저자들이 이 책을 쓸 때 세웠던 목표 중 하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문화적 세계관에 완전히 매몰돼 꾸는 인생의 꿈에서 깨도록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오스트리아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는 1910년에 그린 유명한 작품 <죽음과 삶>에서 이와 비슷한 견해를 그림으로 묘사했다. 이 그림에 나오는 사람은 다들 죽음의 현실에 눈을 감고 있지만 한 젊은 여성은 눈을 뜨고 깨어 있다. 이 책 역시 마찬가지로 독자에게 문화와 자의식의 수면 위로 머리를 꺼내도록 하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물위의 풍경은 아름답지 않고 불길한 악취가 감돌 수도 있지만, 어쨌든 우리는 언제가 결국 물 밖으로 나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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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베티카는 스위스(aka 헬베티아)의 Haas 활자 주조사에서 Max Miedinger와 Eduard Hoffmann이 1957년에 개발한 글꼴이다.
1896년 태어난 악치덴츠-그로테스크(Akzidenz-Grotesk)를 손봐서 만들었다고 알려진다(악치덴트=인쇄용, 그로테스크=산세리프체).
악치덴츠-그로테스크가 어떻게 태어났는지는 다음에 따로 다루기로 하고, 이 초기 산세리프는 당대의 힙스터들을 강하게 매료시켰다. 신 타이포그래피의 주창자인 얀 치홀트(Jan Tschichold)는, "과거와 결별하는 새로운 시대정신을 대표할 수 있는 서체는 산세리프 서체뿐"이라는 명언을 남기고, 1928년 자신의 저서 『신 타이포그라피』의 본문용 선체로 악치덴츠 그로테스크를 사용했다. 바우하우스가 해체되고 유럽 여기 저기로 뿔뿔이 흩어진 독일 디자이너들이 계속 악치덴츠-그로테스크를 애용하다가, 스위스 디자이너들에 의해 변형되어 탄생한 오늘날의 헬베티카는 1960년대 공격적인 마케팅을 통해 전 세계로 보급되었다.
이렇게 보면 뭔 차인지 알기 어려우나
집중해서 살펴보면 이런저런 차이가 있다
헬베티카의 인기는 글꼴이 주는 정확함, 정교함, 신뢰의 이미지 덕분에 1960~70년대에 정점을 이루게 되었고, 이 이미지 덕분에 수많은 기업들과 단체들이 헬베티카를 디자인의 대상,영역 구분 없이 넓은 방면에 쓰게 되었다.
1950, 60년대 스위스의 모던 타이포그래피 양식은 디자이너의 주관이나 개성적인 스타일 보다는 전달해야 할 내용의 객관적 해석과 이를 명확하고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사진, 그림, 텍스트 등 다양하고 복잡한 요소들에 질서와 통일성을 부여하는 그리드 시스템과, 그 그리드에 딱 맞는 간결하고 가독성 높은 글꼴 헬베티카는 스위스 모더니즘의 전도사가 되어 전 세계에 확산되었다.
엄청나게 많이 쓰이므로 마땅한 영문 폰트를 고르기 어려울 때는 그냥 헬베티카를 사용하면 안전할 수 있다. 혹은 특별한 느낌을 주지 못할 수도 있다. 애플에서는 헬베티카를 ios와 osx의 기본 글꼴로 사용하다가 DIN 폰트를 기반으로 만든 '샌 프란시스코'로 기본 글꼴을 변경했다.
맥스 테그마크의 유니버스
동아시아에서 새 책이 나왔다.
지난 주말에 샀는데 이제서야 읽기 시작했다.
표지가 예뻐서 크게 올려야지...
- Amazon Best Sellers Rank: #20,631 in Books (See Top 100 in 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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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5 in Books > Science & Math > Astronomy & Space Science > Cosmology
- #149 in Books > Science & Math > History & Philosophy
->미국 아마존 상태(2017-05-20 기준)
14년에 출간됐고 15년에 표지가 한 번 갈린 듯한데 동아시아는 14년도 페이퍼백 표지를 사용했다. 브룩만 에이전시 책이다. 표지 일러스트의 저작권자는 Sodavekt라고 되어 있는데, 찾아보니 Andrew Gibbs라는 사람이 운영하는 디자인 스튜디오라고 한다. 이름을 기억해 둬야지... 600페이지인데 서점에 들렀다가 계획에도 없이 사들고 나온 이유는 내지 디자인이 너무 예쁘게 되어 있어서 텍스트가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맥스 테그마크는 '수학적 우주' 라는 주제로 600페이지짜리 책을 쓸 결심을 내렸을 만큼 일단 말이 많은 사람으로 보인다. 수식을 말로 대체하는 능력을 보여주는 과학책 저자들 가운데 일부는 조금 독특한 이력을 지닌 경우가 있는데, 문학에서 자연과학 분야로 외도를 하던가(제임스 글릭), 잡지를 창간한 수학자이거나(이언 스튜어트), 수리 물리학자이면서 철학, 비교문학 및 심리학 교수를 겸임하기도 한다(호프스태터). 지금은 MIT 물리학과 교수지만 맥스 테그마크도 '스톡홀롬 경제 대학'으로 그의 이력서를 시작한다.
이언 스튜어트는 '어떻게 대중 수학 서적을 쓰는가'(라는 에세이 안의 '대중 수학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많은 사람에게 이 표현은 모순적이다. 수학은 대중적이지 않다. 신경 쓰지 마라. 대중화는 원래 그렇지 않은 무언가를 대중적으로 만드는 기술이다. 그리고 또한 순수한 관심을 갖고는 있지만 전문 저널을 읽는 데 필요한 기술적 배경지식이 없는 사람들에게 수준 높은 내용을 보여 주는 기술이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대중 수학 서적은 이 두 번째 독자를 다룬다. 5살 때 수학을 끊었고, 증오하고, 그것을 절대 다시 보거나 듣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게 수학의 아름다움, 능력, 유용성을 깨닫게 해 주는 책을 쓰는 것은 굉장히 멋질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로 인해, 그들 중 아주 적은 수만이 그런 책을 읽을 것이며 당신은 시간을 낭비하게 될 것이다.
그저 우주에 관심이 있을 뿐인 대중에게 수학이라는 주제를 꺼내드는 것은 곧 작가가 약장수가 되어야 한다는 걸 뜻한다. 그는 수식 하나당 매출이 반이 된다는 출판계의 속설대로 자제력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는 당연히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특히 입자와 파동과 다중우주를 수식 없이 논할 수 있다면 그사람은 퓰리처상 최종심 후보에 오르게 될 확률이 높다. 맥스 테그마크는 그걸 잘 해내면서 각 장이 끝날 때면 친절히 요점 정리까지 해 준다.
1장의 다음 단락은 저자가 이 책에 찍은 방점을 잘 보여준다.
그러면 실체란 무엇인가? 대담한 제목을 단 이 장의 목표는 오만하게 궁극적인 해답을 독자에게 억지로 주입하려는 것이 아니며, 독자를 내 개인적 탐험 여정에 초대하고 의식을 확장하는 수수께끼에 대한 내 흥분과 숙고를 공유하려는 것이다.
...
이 책의 에이전트인 존 브록만과 이 책에 대한 아이디어를 처음 의논했을 때, 그는 내게 분명하게 요청했다. "나는 교과서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생각을 담은 책을 원합니다." 즉, 이 책은 일종의 과학적 자서전이다. 비록 나 자신보다는 물리학에 대한 것이긴 하지만 물리학을 객관적으로 조망하고 학계의 합의점과 대립적인 모든 관점을 공평하게 소개하는 일반적인 대중과학 서적과는 분평히 다르다. 그보다 이 책은 실체의 궁극적 속성에 대한 내 개인적 탐구를 담고 있으며, 독자들이 내 눈을 통해 보는 것을 즐겼으면 좋겠다.
이 책이 지금껏 나온 우주론 베스트셀러들을 대체할 새로운 책이 될 수 있을지 기대된다..
한동안 주말마다 까페에 들고 나가 재밌게 읽을 것 같다. 번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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